As a fysiotherapist

상식, 구속복 그리고 윤리적 책임

iTherapist 2020. 6. 29. 15:01


20년이다. 이 업계에 발을 디딘 지 말이다. 겨우 20년. 게다가 실제 임상경력을 따지자면, 진정성 가지고 성실하게 일한 순간을 모두 합치면 한 3~5년쯤 되려나? 더 짧으려나?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은 (개인적) 것이 하나 있다.

뛰어난 치료 테크닉이나, 멋있는, 효과적인 운동을 시행할 때는 지켜야 할 것이 많다. 알아야 할 것도 많다. 그런데 잠시 고객의 몸에서 손과 눈을 떼어 생각해보면, 즉 잠시 그 기법과 운동의 ‘절차와 목적’을 생각해보면, 모든 테크닉과 운동 방법, 시술 방법들은 *상식*적인 틀을 벗어난 적이 없다. 우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테크닉들은 모두 시행 목적을 가진다.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말하지 않고 전달되는 테크닉 또는 운동 방법 교육이 있던가? 지금껏 내가 경험한 그 목적들의 내용과 지향점은 모두 ‘상식의 틀’을 벗어난 적이 없다.

말하자면, 이런 상식이다. “구조가 기능을 결정하지만, 때론 기능이 구조를 만든다.” 엉덩관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엉덩관절의 구조와 해부학적 제한 요인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또 엉덩관절에 작용하는 근육들의 협력과 힘 작용 방향에 제한을 받는다. 하지만, 그 엉덩관절의 구조와 근육의 협력 패턴을 만드는 것은, 심지어 뼈, 관절의 구조, 근육의 성장을 만드는 것은 바로 기능적인 활동이다.

그렇게 움직여야만 그런 모양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힘이 가해지도록 해야만 그렇게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장인의 손에 맞추어서 손잡이가 변형된 도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장인이 하는 일과 동작에 맞추어 그 작업을 할 때 가해지는 힘과 그 힘의 작용 방향에 맞추어 손잡이가 변형된다. 결국 그 변형으로 장인의 손놀림은 더 협응적으로 변한다.

성장 중인 아이들을 치료하거나 운동을 시킬 때는 이런 상식에 기반해서 시키면 되는 것이다. 부하가 가해져야 뼈가 성장한다. 뼈를 포함한 결합조직은 부하가 가해지는 곳에서, 부하의 방향에 따라 모델링된다. 그러니 생리적 뼈나 관절의 성장을 바란다면 체중을 싣고 부하가 가해지도록 해라. 거기 무슨 현란한 테크닉과 거창한 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근긴장을 따지고, 운동발달단계를 따질 것이 없다. 상식이다. 그 어떤 어려운 해부학적, 생리학적, 병리학적, 생체역학적 용어와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해도 상식은 변하지 않는다. 상식은 고차원적 시술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조심하거나 우려해야 하는 사항들이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고객들에게 가상의 #구속복을 입힌다. ‘하면 큰일 나는 것들’, ‘가급적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일반 운동 센터라면 권고하는 분위기이지만, 병원이라면 권고를 뛰어넘는다. 지시사항 내지는, 지침 사항이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 문제가 발생하면 공동 책임 내지는 그것을 한 ‘너님의 책임’이라는 맥락이 형성된다. 윤리적 책임의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움직임을 다루는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구속복의 형태는 ‘움직이지 말라는 말이다.’ 물론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겠지. “그렇게 움직이지 마세요.”, “그런 동작을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의 구속복이 입혀지는 순간이 윤리적 책임 내지는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다.

상식이 처참히 제거된 또 다른 상황을 보자. 아니, 상식이 이론적 틀에 가려진, 상식이 테크닉 시행의 명분에 가려진 또 다른 상황을 보자. 재활센터에서 어떤 치료사가 “걷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믿어지는가? 걷지 마세요라니... 물론 이 치료사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해서 시도하면 비정상적으로 근긴장이 올라가게 됩니다. 강직도 더 심해지고요. 연합반응도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비정상적인 움직임 패턴이 나옵니다. 그런 식의 걸음은 실제 근육 수축에 의한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불수의적인 근육의 작용, 즉 강직을 이용해서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걷는 것은 질적으로 보기 좋지 않고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준비가 될 때까지 무리하게 걸으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공손하게 말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전문적인 용어와 개념들을 사용해서 설명했더라도, 결국 ‘지시사항’은 걷지 마세요 이다. 믿어지는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해도 되는 말인가? 그 말을 듣고 발병 후 6개월 동안 걸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환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도 그분은 그 치료사와 그 병원에서 받은 지시사항을 철저하게 지키는 중이었다. “아니 걷고 싶으면 걷는 것을 자꾸 연습해야 하는 거 아니어요? 그게 상식 아니어요?”라고 따지는 아내와 맨날 싸우면서도 그 지침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어떤 테크닉과 치료 또는 운동 개념도 ‘움직이지 말라’고 가르친 적은 없다. 움직임을 개선하기 위한 행위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 비상식적인 상황들이 펼쳐진다. 움직임과 관련된 구속복의 의도는 악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많은 경우에, 악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구속복을 준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환자와 고객을 걱정하는 자신의 의도에서 벗어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 구속복은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니, 절대 해가 될 일이 아니며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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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된 글*의 본문 중...)
“트리스탄 해리스가 말하는 진정한 두려움은, 디자이너 스스로가 결과물이 세계에 끼칠 파장을 예측하지 못하는 지점이다. ... 모든 것이 너무 과열됐고, 기업은 더 본능적인 것을 자극해 관심을 끌어야 한다. 당장 디자이너가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윤리적 경각심을 가지는 것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 같다.”

구속복이 끼칠 영향을 예측하지 못하더라도, 그 파장을 생각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윤리적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상식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으면 좋겠다. “왜 안돼?”, “진짜로?”, “그렇게 움직이면 진짜 큰일 나?”라는 상식적 질문 말이다. 거기 무슨 거창한 이론과 테크닉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자신이 무의식 결에 제안하고 있는 움직임의 구속복도 한번 점검해봤으면 좋겠다. 그 구속복을 해체해서 다르게 개조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 고객을 위해 구속복 중 일부를 뜯어 버려도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움직임 전문가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오더를 받고 구속복을 박음질하는 산업용 ‘미싱 로봇’이 아니다. 그러기보다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또 언제든지 자신이 고객을 위해 만든 옷을 스스로 쓰레기라면서 찢어버릴 수 있는 ‘이론적 변덕쟁이’ 되어야 한다.

당장 큰일 나지 않는다고 윤리적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윤리적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 https://brunch.co.kr/@cliche-cliche/61?fbclid=IwAR0wP_OeHE-V96lQ5rapg35qnJhNwFDbYo9zZbTKDWWZfFBX3D0yGnBR7m4 )

구글의 디자인 윤리학자

트리스탄 해리스와 디자인 윤리학 | 실리콘 밸리의 양심이라 불리는 트리스탄 해리스(Tristan Harris)는 3년간 구글의 디자인 윤리학자로 일했습니다. 스탠퍼드에서 행동경제학, 사회심리학 등을 연

brunch.co.kr

(브런치, 성연님의 페이지 https://brunch.co.kr/magazine/design-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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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과토론후에 #연극이끝나고난뒤 #나홀로객석에앉아 #너나잘해 #라떼는말이야 역시 #고구마라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