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깝다. 읽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을 주는 책을 읽는 즐거움이란... 나의 즐거움 하나가 또 사라졌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의 완결편 3편이 지난 달에 출간되었고 난 그 책들을 다 읽어버렸다. 난 이제 어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즐거움을 느껴야하나.
학창시절 세계사를 이렇게 이해했다면 역사적 지식은 물론 보다 스케일이 큰 역사관을 가졌으며 통찰력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감흥을 많이 받았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메마른 정서의 소유자인 나는 온통 좌뇌를 총 동원하는 책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욕을 한다해도 할말이 없다.
소설을 읽으면 인문학적 소양이 길러지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해도 될까.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이 특정 사건 또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또는 그녀)가 느끼는 심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갈등과 대립을 해소해나가는 과정을 간접 체험 또는 상상해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본질과 본성을 깨닫게 되고 인간을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소양이 길러진다는 식으로...
위에서 언급한대로 책을 통한 인문학적 소양을 기른다는 말의 의미가 틀리지 않다면, 시오노 나나미의 책들은 그를 위한 최고의 책이라고 감히 말한다. 로마인 이야기도 그렇고 십자군 이야기도 전쟁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기록들에 기초하여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쟁 이야기이다. 그치만 시오노 나나미의 책들은 전쟁에 관한 기록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역사의 중요한 사건에 휘말린 그리고 그를 중심에서 해결해나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과 선택 그리고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에 관한 작가의 상상력이 주된 내용이라고 해야겠다.
고등학교 때 등장하는 십자군에 관한 나의 기억은 '제 1차 십자군 0000년, 제 2차 십자군 0000년...'이 전부이다. 뭐, 년도도 기억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슴에 커다란 십자가가 그려진 갑옷을 입은 군대의 삽화 정도가 내 머리속에 들어 있는 십자군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이다. 그런데 십자군 이야기를 읽으면서 십자군의 역사에 대해 더 깊이 알게된 것은 물론 유럽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사실 이 호기심 유발이 내게는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짧으나마 현대에서 중근동의 내부의 갈등, 두 일신교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갈등, 유럽과 중근동의 갈등, 이스라엘과 팔라스타인의 갈등의 역사적 근원을 이해하게되었다. 또 호기심도 생겼다. 이 갈등들의 근원을 좀더 파고 들고 싶다는 생각.
'십자군 전쟁'이라는 말 자체부터 사실 한쪽으로 편향된 역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는 생각을 한다. 전쟁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의 갈등도 있겠지만 언제나 전쟁은 두개 이상의 집단이 연루되기 마련이다. 십자군 전쟁도 그리스도교를 믿는 나라와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가 성지 탈환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충돌한 전쟁이다. 그리스도교 쪽에서는 '신이 바라신다'는 기치로, 이슬람쪽에서는 '알라가 바라신다'는 기치를 가지고. 즉 두 주체는 그리스도교 민족과 이슬람 민족이다. 그런데도 십자군 전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어쩐지 이 전쟁을 로마 교황청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던 나라들의 입장만을 고려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군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이슬람쪽 사료에 따르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동안 기록된 그리고 해석된 역사가 주로 서구의 시각에 편향되어 서구의 역사 기록물에만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작가 본인은 양쪽의 시각을 모두 고려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작가는 이슬람쪽 사료를 근거로 삼아 그리스도교쪽의 자료를 반박 수정하는 시도도 하며 반대로 이슬람쪽 자료를 반박하기도 한다.
'순수한 객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에서 멀어져 있을 뿐이다'라는 것이 평소 내가 가진 소신 중 하나이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 특히 그 기록물들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생각은 생각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생각, 배경, 맥락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사건의 연루자들이 진술 또는 기술하는 자료는 어떠할까.
이런 면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양쪽의 사료들을 근거로 삼아 균형을 유지하면서 십자군 이야기를 전개하는 모습에서 나는 또다른 호기심이 생겼다. 십자군 전쟁과 역사를 바라보는 이슬람쪽 사람들의 생각과 평가는 어떠할까라는. 어찌보면 역사를 대할 때 당연히 요구되는 이 생각은 쉽게 간과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줍잖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제국주의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한다면 아니 진실을 보려는 노력 조차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슬픈 일이지 않겠는가. 이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관의 역사를 '동북아공정'에서 우린 실감하고 있지 않은가.
한권을 읽고 또 일년을 기다리는 설레임과 졸음을 참아가며 책을 읽은 또 다른 경험은 기억나지 않는다. 또 이런 책이 나에게 나타나겠지.
-----------------------------------------
그나저나 시오노 나나미는 남자에 대한 일가견이 있는 분 같다. 특히 유럽의 남자들에 관해서는. 그동안 역사의 주인공들이-적어도 남겨진 기록물들에서는-남자들이기도 하고 역사 속에서 나오는 그들의 심리와 역할에 대해 많은 저술을 하시다보니 그러한 안목이 저절로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시오노 나나미가 남자라는 주제로 쓴 책도 있었다. 남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으셨는지 제목도 '남자들에게'이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보고 시오노 나나미를 알게 되었고 그 뒤로 산 책이니 '남자들에게'라는 책도 그 무렵에 출간되었지 싶다. 한 14년 정도 되었을까.
그책에서 작가는 응당 남자들이 갖추어야할 지덕체에 대한 조건들을 나열한다. 말 그대로 '이상적인 남자'를 보여주는데 여자분들은 읽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눈과 코가 엄청 높아질테니... 시오노 나나미가 평생을 이탈리아, 지중해 연안, 유럽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그 동네 남자들의 이야기를 써와서 일까. 이 책에서 이상적인 남자는 주로 이탈리아 특히 유럽 신사들을 기준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적 신사도 고귀하고 멋있는데 말이지, 쩝.
그리고...
쓸데없는 의문점 하나, 십자군이야기 3편에서 몽골제국의 정복지를 설명할 때 우리나라 지도가 나오는데 동해가 '동해'로 표기되어 있다. 설마 일본 사람인 시오노 나나미가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East sea'라고 했을까, 아님 번역자들의 센스로 우리말 책에만 동해로 표기한 걸까? 십자군 이야기 원본을 구할 수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네.
'Unbearable Lightne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우네 집에 초대합니다. (0) | 2012.08.05 |
---|---|
삶은 여행.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맙시다. (0) | 2012.06.29 |
돈 먹는 하마 New iPad - Inventory (0) | 2012.05.25 |
아내에게 샘소나이트 백팩을 바치다. (Pro-DLX3 Laptop BP L/M) (0) | 2012.05.04 |
노트 커버를 주문하다... (0) | 2012.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