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계획 노트를 쓰자

(글을 쓰는 능력이 워낙 바닥이어서 뭔 말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 하려는 말을 먼저 적자면, "치료 계획 노트를 쓰자" 정도가 되겠다)

치료 계획 노트를 쓰자

임상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것을 기록해야 한다. 재활분야도 예외는 없다. 고객/환자의 정보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기를 요구받는다. 고객이 자신들의 언어로 호소하는 문제점들뿐 아니라 전문가로서의 판단도 적는다. 더 중요한 기록은 파악된 문제점에 대한 중재 내용이나 컨설트 내용이다. 

무엇을 했느냐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일은 고객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인 행위인 것이 분명하지만 사실 전문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건강관리분야의 전문가들은 업무의 특성상 여러 고객을 관리해야 한다. 단기간 동안 지속해서 관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장기간 간헐적으로 대면하고 중재하며 관리하는 경우가 더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객에 관한 정보나 자신의 중재 내용을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건의료인들이 메모와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이유는 직업적 특성이기도 하다.

내가 일하는 재활분야에서도 메모와 기록의 중요성은 그대로 이어진다. 매 순간이 -임상에서는 매 순간이 중요한 순간이다- 주요한 사건인 임상 현장의 순간들을 자세히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 내가 수행한 일을 기록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인 장치이기도 하고 나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의식과 같은 일이기도 하다. 또 오늘 기록한 정보는 다음 치료를 위한 중요한 정보이자 근거가 되기도 한다.

수행 사항과 경과 내용에 대한 메모와 기록, 아주 중요하다. 인정한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10여 년 넘게 이 분야에서 빌어먹고 살다 보니 문제점이 하나 보인다. "수행기록" 또는 "경과기록"이라고 하는 것들이 모두 과거이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내가 보기엔) 수행기록과 경과기록이 모두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기록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수행기록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토시를 다는 것이 아니다. 지나버린 사건들을 기록하는 데에만 집착한 나머지 앞날 또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이 내가 느끼는 문제이다. 정작 중재를 해야하는 특정 상황에서 계획된 행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말과 행동이 나온다. 사실 이것까지는 능력으로 봐줄 수 있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관행대로(생각 없이) 하거나 아무 의미없는 '짓'을 하고 마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치료계획을 초기에 다 수립하잖아.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중재를 실행하고 진행해가는 거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주변을, 내 과거를 돌아보며 말하지만 그것은 말뿐이다. 그냥 말뿐이다. 재활은 '대증적 중재'로 접근하기 어렵다. 그날그날의 증상에 따라 중재 내용과 계획이 급격히 달라지는 그런 일이 아니다. 초기에 인터뷰에서 고객과 합의하여 목표가 설정되면 하루하루 수행하는 중재와 그 내용은 멀리 보이지만 분명한 목표 지점과 관련이 있거나 그에 필요한 것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최종 목표", "중간 목표" - 어떻게 부르든 간에 - 도 중요하지만, 그 중재 세션의 목표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활분야의 전문가들은 지금 이 순간의 치료 세션에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오늘 만나야할 고객, 또는 이 치료 시간이 끝나고 만냐야할 또 다른 환자와 '지금 이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주 답답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기록과 앞으로 일어날 또 해야할 일을 적은 메모는 그 역할 상 큰 차이가 있다. 명분을 따지자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아니다.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아주 기억력이 뛰어나서 자신이 담당하는 고객들의 정보를 모두 머릿속에 정리하고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창의력이 샘물처럼 넘치며 매 순간마다 최종 목표와 관련된 중재 내용을 바로바로 쏟아내는 능력의 소유자들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에서는 그런 능력의 소유를 확인할 길이 없다.

난 참 창의적이지 못한 사람이다. 난 사실 치료에 앞서 오늘 할 일을 노트에 적지 않으면 치료 시간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10년 넘게 일하면서도 아직도 그런다. 아무래도 내가 능력이 부족한 듯하다. 그래서 난 나의 기억력과 분석력 그리고 창의력을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적는다. 또 적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으려고 마음 먹으면 그날 고객과 만나서 해야할 일들이 생각난다. 또 그것이 최종 목표와 의미가 있는 지, 또는 도움이 될런 지를 따져볼 수 있다. 적고 미리 생각하면 그날 할 일을 고객에게 설명할 수 있다(사실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우린... ㅠㅠ). '오늘 중재에서는 무엇을 할 것이고 또 어떤 결과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 결과가 우리의 최종 목표와는 이런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고객은 이런 치료사를 원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해주는 전문가에게 자신의 몸과 인생을 - 삶으로의 복귀를 위한 것이니 - 맡기는 것 아닐까.

매일매일의 치료 세션에서 해야 할 일은 초기 계획 수립 시에 세울 수 없다. 모든 고객의 문제가 그것이 가능할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자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고객들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회복한다. 상황이 변하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맞추어 또 그들의 회복 단계에 맞추어 그날의 치료 시간에 해야 할 일들을 초기 평가 시에 정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경험이 더 필요한 듯 하다.

사실 몇 년 전부터 팀원들에게 치료계획 노트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문화 -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 아직도 자리 잡지 못했다.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 못하는 많은 핑계가 있겠다. 적어내라면 내가 더 많이 적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예측이 가능한 핑계들이다. 그 많은 난관이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런 많은 핑계가 있음에도 '생각 없이, 계획 없이, 아무 의미 없이'하는 치료 행위의 윤리적 책임은 치료사 자신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각오 차원에서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