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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10:12 - MK@ iTherapist

계약서요? 무슨 계약서요?

"네? 계약서요? 무슨 계약서요?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한 마디 할 때마다 ‘허허'라는 추임새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황당한 말을 듣고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결심을 한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말하는데 필요한 공기량을 충분히 채우고는 내말 잘 들어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30년 동안 이쪽 교수님들, 000교수, 000교수님 아시죠? 제가 그런 사람들하고도 계약서 없이 일 해왔어요. 사람 못 믿어요? 박사님? 돈이 급하세요? 사람 못 믿고 어떻게 일 해요. 이박사님 책 작업 처음 해보세요? 학교 000 나오셨죠? 거기 000 교수님에게 여쭤봐요. 그런 분들하고도 계약서 없이 해왔어요. 한번 물어보세요."

그는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겠지'하며 안도하는 듯, ‘나 원참'이라는 추임새로 말을 마무리 했다.
사실 처음부터 분위기는 이렇게 한여름 승용차 지붕처럼 뜨겁지는 않았다. 매우 비지니스(?)적이었다. 사단의 시작은 번역 조건, 작업 기간, 출판 예상 시기 등을 조율하고 내가 뱉은 말 한마디부터 였다.
“네 좋습니다. 사장님. 그 조건으로 하시죠. 그럼 계약서 보내주세요.
두둥! 털썩!! OTL..
'계약서라니. 그런 금기어를 말하다니. 계약서라니. 계약서라니? 피래미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 나올 지는 생각도 못했다. 허허.'
계약서는 그에게 금기어였던 것이다. 해서는 안될 말. 다 내 잘못이다. 금기어를 말하다니...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언젠가 들은 바에 의하면 80살 가까이 된다고 한 것 같았다. 간접적으로 그 출판사 책 작업을 한 적이 있던터고, 워낙 이 업계(?)의 거물급들만 상대해오신 어르신이어서 기억 못하시겠지만, 다른 건으로 여러 번 통화한 적도 있던 터라 자동적으로 생성된 내 감정에 따라 응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음.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사장님? 제 이야기도 들으셔야죠. 저는 책 작업이 처음이 아니라, 계약서를 쓰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가 처음입니다.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흥분하시면 어떡합니까? 저, 돈 궁하지 않아요. 몇 백만원 받으려고 하려는 것 아니란 말입니다. 계약서 보내달라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입니까? 제가 예의에 어긋나는 어떤 것을 요청했나요? 저 이 작업 하지 않겠습니다."

그 책은 원저자가 나에게 한국어 번역을 부탁한 책이었다. 번역자를 선택하는 것은 원저자의 권한은 아니란다. 그치만 자기 에이젠시 담당자에게 한국어 번역 작업자를 지정하겠다고 이야기 하겠다고 했다. 할 수 있겠냐고 해서 난 할 수 있겠다고 했다. 에이젠시는 한국 출판사에 이 사항을 전달했고, 그렇게 출판사가 나에게 연락을 해온 상황이었다.
더 황당한 일은 그 뒤에 일어 났다.
몇 주 후, 원저자가 나에게 메일을 보내 왔다. 번역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어찌된 #영문 인지 내게 물었다. 메일에는 #출판사 사장님이 보낸 메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출판사 사장님의 메일 내용은 매우 단순 명쾌했다.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우리가 번역 요청을 했는데 이박사가 번역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른 번역자를 지목해달라. 없으면 우리가 그냥 정하겠다."
뭐, 사실이다. 그는 노련한 신사답게 사실을 전혀 왜곡하지 않고 전달했다. 맞다. 내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황을 제거하니 이렇게 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원저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정황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과 대화 배경에 깔린 정황/맥락을 설명하려니 어려웠다. 가뜩이나 영어도 짧은데 그런 상황을 전달하려니... 쓰다보니 변명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야! 니네 좀 쫌스럽다.'라고 생각하면 어쩌나하는 우려도 들었다.
벌써 5년이나 지난 일이다.
...



요즘 책을 한 권 번역하고 있다. 책 두께만 보고 하겠다고 결심 했는데 내용이 만만치 않다. 온통 은유와 비유로 가득차 있고 썰렁한 농담들이 추임새처럼 곳곳에서 튀어 나오는 책이다.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해보지 않은 촌놈에게는 너무 버거운 책이다.
출판사 담당자에게 독촉 전화를 받고 '이제는 끝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옆구리에 셀프로 박차를 가하면서 진행하고 있다. 출판사 관계자와 통화를 하다보니 위에 적은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원래 큰 목소리를 못 내는 소심이인지라 조용조용 대응하긴 했지만, 온통 주변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온 영감님이니 그것을 감안하여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실 지금 작업 중인 책도 계약서를 쓰지 않고 진행하고 있다. 또 그런 경우도 여러번이다.
그러나 오늘, 같은 전화를 받는다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을 듯 하다.
내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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